당구

11/05/2019

양자 역학적 세계관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因果律에 저항하며 世界線을 넘나드는 어떤 과학자의 純情을 문학적 언어를 사용하여 양자 역학적 세계관을 변환한 곡입니다.



우리가 사물의 존재에 관해 논하기 위해서는 관찰 주체(관찰자 또는 관측자)와 더불어 변화량을 特定할 수 있는 절대적 규준이 되는 물리량이 필요하다고 믿어왔습니다.

그 물리량을 우리는 "시간"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 전자기학을 연구하던 수많은 과학자들이 시간의 절대성에 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합니다.

결국 시간이 절대적 물리량이 아니라는 것이 Einstein의 철학적 사고를 통해 증명되기에 이르렀고, 이때까지 거시 세계를 해석하는 물리학의 근간이었던 Galilei & Newton의 사고 체계를 근본부터 흔들어버리게 됩니다.

즉 거시 세계를 해석하는 역학 체계의 변혁을 가져옵니다. (Galilei & Newton의 사고 체계가 틀렸다는 의미가 아니므로 오해하지 않기 바랍니다.)

이와 더불어 전자기학자들도 시간이라는 물리량(빛)에 관한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독자적 물리 체계를 도출하게 되고 관찰자(관측자)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양자 역학입니다.

그 결과 관측이란 意識을 가진 존재가 "대상을 認識하는 것"으로, 이 세계에 존재하는 물체나 事象은 "관측" 됨으로써 성립된다는 사고 체계가 만들어집니다.

이 말은 가령 누구에게도 관측되지 못한 경우, 누구에게도 그 존재가 인식되지 못했기 때문에 실제로 그곳에 그 무언가가 있다 하더라도 "존재한다" 라고 말할 수 없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 역도 성립합니다.)

좀 더 확장하면 누군가가 "없는" 것을 "있다" 라고 認識하게 되면 실제로 그 무언가가 존재해버리게 된다는 역설(paradox)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 역설을 神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어하는 자들이 사용하고 싶겠지만 "없는 것을 있다라고 認識한다"의 조작적 정의를 내리지 못하는 이상 그들에게는 그림의 떡입니다. 그들이 幻想과 認識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이것을 현대 물리학에서 Heisenberg의 "불확정성 원리"라고 합니다. (제가 과학 비전공자도 이해할 수 있도록 간단히 설명했을 뿐, 이렇게 간단한 논리는 아니라는 점을 밝힙니다. 정확히 설명하기 위해서는 운동량을 지닌 미시적 입자의 존재와 이를 관측하는 방법론을 언급할 필요가 있는데, 좀 이해하기 어려워집니다.)

이러한 새로운 인식론의 등장은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구조를 해석하는데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으며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버렸습니다. (그 가능성에 대해 여러분도 주변에서 익히 들어 이미 알고 있습니다. 윗 곡의 가사 속에도 그 의미가 들어 있고요.)



여러분도 수학 시간에 "발산"과 "수렴"이라는 것을 배웠을겁니다.

수열로부터 공비의 규칙성을 찾아내어 무한급수 일반식을 도출하고 일반항을 특정하여 그 조건에 맞게 계산하는 단순한 문제 풀이의 스킬로써 학습했지 이것이 세계의 구조를 認識하는 하나의 방법이라는 것을 배운 사람은 아마도 없을겁니다.

뿐만 아니라 "복소수"를 구성하는 "허수"라는 개념이 시간이라는 물리량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설명해주는 수학 교사 또한 아마 없었을 겁니다.

아마 수학 교사들도 이런 교육의 문제점을 모르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대한민국의 교육 현실에서 수학이 지닌 의미를 가르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학창시절에 우리는 수학을 단지 입시의 도구로 사용했을 뿐입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일겁니다.

극단적으로 "일상 생활을 하는데 수학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돈 계산만 할 수 있으면 되지" 라는 논리가 형성되어 수학의 의미를 부정하는 사태까지 발생합니다.

현재와 같은 교육 현실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일으킬 과학자나 수학자 등의 존재가 대한민국에서 등장할 수 있을까요?



저는 윗 곡의 가사 중에서 "孤独の観測者 (고독한 관측자)" 라는 부분을 좋아합니다.

孤独의 사전적 의미 중에서 "홀로이기에 외롭다" 라는 의미가 가장 대중적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러나 孤独의 핵심은 "외롭다"가 아니라 "홀로", 즉 "나를 제외하고는 세계에 그 어떤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것입니다.

"홀로"인 그 어떤 자가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홀로"된 그 어떤 자를 관측해줄 수 있는 누군가가 세계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Descartes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명제를 통해 "홀로"된 자가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생각"이라는 그 과정이 "홀로"된 자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 뿐입니다.

양자 역학적 세계관이든 문학적이든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외로움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홀로"가 아닙니다.

즉 여러분은 孤独하지 않기에 외롭지도 않습니다.

혹시 외롭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虚像이며, 단지 심리적 원인으로부터 기인한 감정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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