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구

12/06/2022

★4~6のソフィア

Caravan Storiesの筆者にはとても大切なヒーローであるソフィア様

<★4>


<★5>


<★6>

1/07/2020

ベルサイユのばら


장미와 같은 고귀한 운명으로 태어나 장미처럼 아름답게 져버린 사실상 프랑스 정통 왕조의 비운의 마지막 왕비 Marie Antoinette의 일대기를 다룬 ベルサイユのばら(베르사이유의 장미) 오프닝 곡입니다. (그림은 작품의 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작중 가상의 인물 Oscar François de Jarjayes입니다.)

정치적 희생양으로 단두대에서 사라진 그녀는 프랑스 혁명 당시의 법정 기록을 비롯한 그녀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에 관해 재평가가 현재진행형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로마 황제 Nero Claudius처럼 우리에게 와전된 이야기가 많은 여왕입니다.)

Maximilien Robespierre의 공포 정치와 그에 선동당한 무지한 백성들의 피의 혁명이 만들어낸 프랑스 공화정이 현재 프랑스의 뿌리입니다.

저는 요즘도 종종 발생하는 프랑스 국민들의 과격 시위가 과거 프랑스 혁명 당시 선동되고 이용당했던 無知蒙昧한 백성들이 행했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남의 나라 이야기 같지만, 우리나라의 현 정부와 그들이 만들어낸 프레임에 갇혀버린 국민들의 모습이 이와 같지 않을까 하는 개인적 견해입니다.

결국 선동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공부하며 스스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래는 각각 바칭코 슬롯 영상과 해상자위대 동경음악대 소속 三宅由佳莉의 cover 버전입니다.






마지막으로 ベルサイユのばら의 원작자 池田理代子(이케다 리요코) 여사의 공식 홈페이지를 링크합니다.

池田理代子

우리에게 소위 순정만화로 알려진 장르의 선구자이자 프랑스 문화를 세계에 알린 공로를 인정받아 프랑스 최고 훈장 Légion d’honneur 중 Chevalier를 받으신 분으로, 우리나라 드라마 "태왕사신기"를 만화판으로 직접 만들어주시기도 하셨습니다.

12/26/2019

新サクラ大戦


전작에 이어 약 13년 만에 발매된 게임으로 우리나라에도 SEGA Korea를 통해 정식 발매되어 유통되고 있는 게임입니다.

이 게임은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게임의 소재로 삼는다는 것은 개발자나 제작사 입장에서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게임 시리즈는 군국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입장에 서 있습니다.)



明治天皇(메이지 텐노우)로 불리는 일본 역사의 성군으로 알려진 睦仁(무스히토) 시기, 텐노우의 힘을 넘어 실권을 장악한 신정부 하급무사들이 일본의 개혁에 나서는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우리가 알고 있는 伊藤博文(이토 히로부미)입니다.

실권을 장악한 신정부는 조선을 침략하고 明治天皇 사후 허수아비 텐노우로 그의 서자인 明宮嘉仁(하루노미야 요시히토)를 大正天皇(다이쇼 텐노우)로 내세웁니다.

大正天皇는 조선 순종의 아들이자 황태자인 영친왕과 친분이 깊어 그에게서 한국어를 배우며 돈독한 관계를 쌓아가지만, 신정부가 좋게 볼리 없었고 결국 일본 제국은 파시즘 국가로 변모하기 시작합니다.

아버지와 달리 카리스마도 없고 존재감마저도 없었던 大正天皇는 선천적으로 몸이 병약하여 오래 살 수 없었고, 결국 심장마비로 사망 후 昭和天皇(쇼와 텐노우)로 알려진 그의 아들 迪宮裕仁(미치노미야 히로히토)가 즉위하게 됩니다.

일본 제국은 점점 파시즘 국가로 변해가면서 열강들과의 세력 경쟁에 나서게 되고 중국에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세웁니다.

그리고 일본 제국은 만주국을 중심으로 당시 알려졌던 세계 최강의 열강들과 관계를 맺고 블록 경제 체제로 만들어 갑니다.

대영 제국이 인도를 중심으로 블록 경제 체제를 만들었다면, 일본 제국은 조선과 중국, 동남아시아 등을 블록 경제 체제로 만들었다고 생각하시면 이해하기 쉬울 겁니다.

그 밖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미국 등의 열강들이 어떤 블록 경제 체제를 만들었는지는 여러분도 잘 알겁니다.

이런 블록 경제 체제는 당시 산업화로 거대해진 자본 세력의 생산성 급증으로 인해 과잉 생산된 생산품을 처리할 방법이 없어서 열강들은 식민지를 개척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쉽게 말하면 물건 떠넘기기), 결국 경제 공황 사태가 발생하게 되고 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됩니다.

암묵적인 정략적 관계를 맺고 있던 일본을 비롯한 열강들은 더 많은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한 경쟁 구도를 형성하게 되고 세계적인 비극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 게임의 이면에는 이런 역사적 배경이 담겨 있습니다.

아래는 SEGA korea에서 공개한 공식 소개 영상입니다.


이 게임의 시리즈들이 유독 일본 여성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얻었었는데, 그 이유는 중심 인물들이 모두 여성이기도 하지만, 역사의 반성을 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SEGA games가 우리에게 알려진 일본의 일부 우익 기업들과는 달리 좀 독특한(?) 역사관을 갖고 있기는 합니다. (일본의 자존심인 전함 야마토도 부서버리는 회사니까요.)



1996년에 발매된 이 게임 시리즈의 최초 발매작 원곡 오프닝 영상을 링크합니다.




올바른 국가관이란 개념은 있을 수 있어도 올바른 역사관이라는 개념은 성립되기 어렵습니다.

올바른 국가관이란 그 국가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인간상이 갖고 있는 국가에 대한 신념을 의미하지만, 역사관은 국가에 따라 해석의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에 올바른 역사관이라는 개념은 객관적이지도 않을뿐더러 성립 자체가 어렵습니다.

그 예로 昭和天皇인 迪宮裕仁를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우리나라는 迪宮裕仁가 일제 강점기의 최정점에 달했을 때의 명목상 국가 통치자이기 때문에 그를 전범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그가 조선 침략의 수괴라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지요.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다만 세계가 해석하는 迪宮裕仁에 관한 시각은 우리와 차이가 있습니다.

세계는 그를 2차 세계대전을 유발한 패전국의 전범들 중 한 명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 관점은 우리의 해석과 큰 차이가 없어보이지만, 본질적인 면에서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에게 과거 역사의 반성과 책임을 물었고, 현재도 일본 정부에게 묻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아픈 역사에서 유발된 감정입니다.

그러나 세계는 이런 주관적 감정이 아닌 세계에 큰 피해를 일으킨 장본인 중 하나로 인식함으로써 세계 평화와 질서를 어지럽힌 사태에 대한 책임과 반성을 요구합니다.

물론 그들의 이런 주장이 가능한 이유는 그들이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었고, 또한 그 당시 세계 최강의 열강이었으며, 지금도 그들은 세계 최강의 국가가 되어 있습니다.

조선의 안위에 관해서 그들은 안중에도 없었을뿐더러 미국의 대통령 Woodrow Wilson은 민족자결주의라는 명목으로 열강의 식민지 점령에 대한 합리화까지 하게 됩니다. (민족자결주의의 핵심은 주권국가의 국권에 대한 인정을 의미하는 것이지 식민국가의 국권에 관해서는 제외된 조항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사실은 승전국들 또한 식민 지배를 정당화했던 국가들이었다는 점, 그리고 우리는 그들에게 그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저는 우리 정부가 영국에게 과거 거문도를 불법 점령했던 사실에 관해 깊은 반성과 사과를 요구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기억이 없습니다.

프랑스 해군이 강화도를 침범하고 그 때 앗아간 우리 문화재들의 반환을 요구한 것에 관해서는 기억이 있으나 우리 정부가 프랑스에게 깊은 반성과 사과를 요구한 사실은 들어본 기억이 없습니다. (물론 우리도 그에 앞서 프랑스에게 프랑스 신부들을 처형한 것에 관해서는 사과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분명 민간인이었으니까요.)

극단적인 예로 패전국 독일은 이스라엘과 유태인들에게 사과를 표명했지만, 자신보다 약소국에 대해서는 사과를 한 적이 없습니다.

역사의 해석이 얼마나 주관적인가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식의 역사의 해석은 결국 더 이상 국가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과거의 상처를 서로 핥아주는 형태 밖에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런 해석이 정권 유지의 도구로 사용된다면 그만큼 끔찍한 일은 없을 겁니다.

왜냐고요?

정권 유지에 이용하기 위한 我田引水 형태의 역사 해석이 파시즘 국가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역사가 이런 용도로 사용되는 것에 대해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11/15/2019

Dara Sedaka - Angel Queen


1982년작 극장판 1000年女王(1000년여왕)의 엔딩곡으로 미국의 유명 Singer & Songwriter인 Neil Sedaka의 딸이 불렀습니다.

1980년대에 MBC에서 이른 아침에 1000년여왕 TV 시리즈를 방영했었는데, 이 작품이 의외로 성인향 애니메이션이라서 미방영분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 작품의 슬픈 스토리는 銀河鉄道999(은하철도999)와 宇宙海賊キャプテンハーロック(우주해적 캡틴 하록)으로 이어집니다.



1000년의 공전 주기를 갖는 행성 ラーメタル(라 메탈)은 1000년에 단 한번 태양에 접근하여 봄을 맞이하기에 ラーメタル 행성인들은 지구인들을 제거하고 지구에 거주하며 영원한 봄을 얻고자 합니다. (어렸을 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행성 ラーメタル의 공전 궤도는 태양계를 구성하는 지구를 비롯한 다른 행성들의 공전 궤도와는 달리 원일점과 근일점의 차가 매우 큰 것 같습니다.)

그러나 1000년여왕으로서 지구에 살고 있던 雪野弥生(유키노 야요이, 본명: ラー・アンドロメダ・プロメシュームプロメシューム 라 안드로메다 프로메슘)는 1000년의 세월을 살아오며 지구인들을 지켜보는 동안 그들을 사랑하게 되어 지구인들을 위해 결국 ラーメタル 사람들과 싸울 것을 결의합니다.

지구를 지켜낸 그녀는 행성 ラーメタル로 돌아가 1000년여왕으로서의 인생을 살며 훗날 쌍둥이 딸을 낳게 되는데, 그녀들이 바로 エメラルダス(에메랄다스)와 メーテル(메텔)입니다.


영원의 봄을 잃어버린 행성 ラーメタル의 강렬한 추위에 견디기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보며 1000년여왕 プロメシューム(프로메슘, 유키노 야요이)은 스스로 기계의 몸이 되기로 결심합니다.

행성 ラーメタル의 사람들이 자신을 따라 모두 기계인간이 되기를 바랬던 것이지요. (행성 ラーメタル의 사람들이 또다시 지구를 침략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던 바램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정치적 계략에 빠져버린 그녀는 기계인간 시술을 받던 중에 따스했던 마음이 제거되고 인격이 붕괴되어 그 결과 악의 화신이 되고 맙니다.

그 당시 어렸던 エメラルダス와 メーテル 쌍둥이 자매는 언젠가 어머니를 구해내겠다고 결의하고 행성 ラーメタル을 떠나게 됩니다.


시간은 흘러 행성 ラーメタル 사람들은 모두 마음을 잃어버린 기계인간이 되어 있었고, 1000년여왕이자 우주의 지배자 그리고 악의 화신이기도 한 어머니를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기 위해 행성 ラーメタル로 귀환한 エメラルダス와 メーテル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을 깨닫게 됩니다.

メーテル은 어머니 プロメシューム에 의해 1000년여왕의 지위를 물려받도록 명령을 받게 되지만 이를 거부하고 결국 시간을 초월한 여행을 떠나게 되며, 여행을 통해 여러 동행자를 만나게 되고(그들은 모두 プロメシューム에 의해 생명을 빼앗깁니다) 최후의 동행자 星野鉄郎(호시노 테츠로; 국내명 철이)와의 인연이 형성됩니다.

언니 エメラルダス 또한 クイーン・エメラルダス号(퀸 에메랄다스 호)의 선장으로서 ハーロック(하록)과 함께 우주를 떠돌며 어머니 プロメシューム에 저항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아래 영상은 2004년에 방영된 宇宙交響詩メーテル 銀河鉄道999外伝(우주교향시 메텔 은하철도999 외전)의 오프닝입니다.


이 작품은 メーテル과 동행자 ナスカ(나스카)와의 스토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즉 メーテル이 星野鉄郎와 만나기 이전의 스토리입니다.



1980년대 당시 MBC에서 방영했던 1000년여왕 TV 시리즈의 오프닝곡을 김국환씨가 불렀는데, 김국환씨의 곡이 Youtube에 있기에 링크해봅니다.

11/05/2019

양자 역학적 세계관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因果律에 저항하며 世界線을 넘나드는 어떤 과학자의 純情을 문학적 언어를 사용하여 양자 역학적 세계관을 변환한 곡입니다.



우리가 사물의 존재에 관해 논하기 위해서는 관찰 주체(관찰자 또는 관측자)와 더불어 변화량을 特定할 수 있는 절대적 규준이 되는 물리량이 필요하다고 믿어왔습니다.

그 물리량을 우리는 "시간"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 전자기학을 연구하던 수많은 과학자들이 시간의 절대성에 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합니다.

결국 시간이 절대적 물리량이 아니라는 것이 Einstein의 철학적 사고를 통해 증명되기에 이르렀고, 이때까지 거시 세계를 해석하는 물리학의 근간이었던 Galilei & Newton의 사고 체계를 근본부터 흔들어버리게 됩니다.

즉 거시 세계를 해석하는 역학 체계의 변혁을 가져옵니다. (Galilei & Newton의 사고 체계가 틀렸다는 의미가 아니므로 오해하지 않기 바랍니다.)

이와 더불어 전자기학자들도 시간이라는 물리량(빛)에 관한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독자적 물리 체계를 도출하게 되고 관찰자(관측자)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양자 역학입니다.

그 결과 관측이란 意識을 가진 존재가 "대상을 認識하는 것"으로, 이 세계에 존재하는 물체나 事象은 "관측" 됨으로써 성립된다는 사고 체계가 만들어집니다.

이 말은 가령 누구에게도 관측되지 못한 경우, 누구에게도 그 존재가 인식되지 못했기 때문에 실제로 그곳에 그 무언가가 있다 하더라도 "존재한다" 라고 말할 수 없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 역도 성립합니다.)

좀 더 확장하면 누군가가 "없는" 것을 "있다" 라고 認識하게 되면 실제로 그 무언가가 존재해버리게 된다는 역설(paradox)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 역설을 神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어하는 자들이 사용하고 싶겠지만 "없는 것을 있다라고 認識한다"의 조작적 정의를 내리지 못하는 이상 그들에게는 그림의 떡입니다. 그들이 幻想과 認識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이것을 현대 물리학에서 Heisenberg의 "불확정성 원리"라고 합니다. (제가 과학 비전공자도 이해할 수 있도록 간단히 설명했을 뿐, 이렇게 간단한 논리는 아니라는 점을 밝힙니다. 정확히 설명하기 위해서는 운동량을 지닌 미시적 입자의 존재와 이를 관측하는 방법론을 언급할 필요가 있는데, 좀 이해하기 어려워집니다.)

이러한 새로운 인식론의 등장은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구조를 해석하는데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으며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버렸습니다. (그 가능성에 대해 여러분도 주변에서 익히 들어 이미 알고 있습니다. 윗 곡의 가사 속에도 그 의미가 들어 있고요.)



여러분도 수학 시간에 "발산"과 "수렴"이라는 것을 배웠을겁니다.

수열로부터 공비의 규칙성을 찾아내어 무한급수 일반식을 도출하고 일반항을 특정하여 그 조건에 맞게 계산하는 단순한 문제 풀이의 스킬로써 학습했지 이것이 세계의 구조를 認識하는 하나의 방법이라는 것을 배운 사람은 아마도 없을겁니다.

뿐만 아니라 "복소수"를 구성하는 "허수"라는 개념이 시간이라는 물리량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설명해주는 수학 교사 또한 아마 없었을 겁니다.

아마 수학 교사들도 이런 교육의 문제점을 모르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대한민국의 교육 현실에서 수학이 지닌 의미를 가르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학창시절에 우리는 수학을 단지 입시의 도구로 사용했을 뿐입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일겁니다.

극단적으로 "일상 생활을 하는데 수학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돈 계산만 할 수 있으면 되지" 라는 논리가 형성되어 수학의 의미를 부정하는 사태까지 발생합니다.

현재와 같은 교육 현실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일으킬 과학자나 수학자 등의 존재가 대한민국에서 등장할 수 있을까요?



저는 윗 곡의 가사 중에서 "孤独の観測者 (고독한 관측자)" 라는 부분을 좋아합니다.

孤独의 사전적 의미 중에서 "홀로이기에 외롭다" 라는 의미가 가장 대중적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러나 孤独의 핵심은 "외롭다"가 아니라 "홀로", 즉 "나를 제외하고는 세계에 그 어떤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것입니다.

"홀로"인 그 어떤 자가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홀로"된 그 어떤 자를 관측해줄 수 있는 누군가가 세계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Descartes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명제를 통해 "홀로"된 자가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생각"이라는 그 과정이 "홀로"된 자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 뿐입니다.

양자 역학적 세계관이든 문학적이든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외로움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홀로"가 아닙니다.

즉 여러분은 孤独하지 않기에 외롭지도 않습니다.

혹시 외롭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虚像이며, 단지 심리적 원인으로부터 기인한 감정의 일부분일 뿐입니다.